한낮 헌책방
볕이 좋은 날
빈 가방을 들고 헌책방에 간다.*
오래된 목차 두 번째 단추까지 풀어
허름하고 가볍게
한 페이지씩 양쪽 어깨에 걸친 책방 주인은
볕을 쪼아먹은 먼지
소반에 뜨거운 양은 냄비로 헌책 표지를 찍는다.
젓가락에 끌려 나오는 면발은 언제나 단행본 순정 만화처럼 혼자 운다.
서가는 모든 책의 밑줄
다들 중요하고 잘난 날들이지만
오래된 문장까지 환한 날들이지만
허기진 가장이 눅눅한 활자를 라면에 말아 먹고 있다.
너덜너덜한 나이가 녹슬고 있다.
변색한 책의 곳간
누구는 회전무대라 하고
뺑뺑이라 하고
혹 누구는 무덤이라 하고
헌책방을 나선다,
인세와 판권은
빈 가방 먼지
안전한 속도로
데워진 중간제목만 읽지만
여름이 난감하다.
불이 났어도
물을 뿌릴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책 세일
나잇값도 모르는 지면 근처를 돌고 돌아 오르내린다.
그네,
언제부터 나를 매달고
앞뒤로 흔드는 제목을 공중에 매달아 놓았을까.
*이운진 시인의 시
보다,는 미친 짓이다
모든 창문은 편집증 환자다
가끔 환각의 빗물을 몇 날 며칠째 흘리기도 하지만
욕망의 방아쇠
어떤 창문은 구름만 먹고 구름만 토해놓는다
농담처럼 꽃 피어도
창문은 늘 창문만 본다
내 눈알 파서 바닥에 내팽개쳐야
눈 한 번 깜빡
엄마는 당신이 살아온 날을 소설로 쓰면 몇십 권은 될 거라면서도 눈 한 번 깜빡하니까 머리가 하얗더라는
되도 않는 역설을 자주 말씀하셨다, 꽃이 핀다
하긴 엄마 뱃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도 황홀한 인연인데 엄마가 한평생 한 번 깜빡인 눈은 얼마나 이생이 아름다울까, 꽃이 나부낀다는 것은 꽃이 진다는 말인데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한 생이 지나고 또 다른 생을 맞는다
엄마가 쓴 이번 생 이야기 읽어보려고 엄마가 서 있던 자리에서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는데
왜 계절은 저만큼 먼저 꽃을 내던지는지 다시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이성수
- 시집 『눈 한 번 깜빡』
『그대에게 가는 길을 잃다, 추억처럼』
시작노트
살다 보니, 필연보다는 우연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의 탯줄을 잡고 낑낑거리면서 태어난 것도 우연이다. 이 우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자의 수를 대면서 확률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 확률치고는 참 더럽고, 치사하다. 생지옥 같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현재라는 시간을 숨 막히게 살아가면서 아침에 탄 기차에서 나보다 좀 젊고, 단정한 여자가 옆자리에 앉아 “먼 데로 여행하시나 봐요?” 하고 물을 줄 꿈엔들 알았을까. 살다 보니, 기차를 많이 타지도 않았는데, 내 옆자리에 여자가 앉은 적도 없고, 여자와 말을 섞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우연히 나에게 말을 걸어온 여자를 만난다. 이 여자와 연애해야 한다. 내게 시는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아서 말을 걸어온 여자다. 그녀와의 연애는 우연이고, 불온한 온기다. 세상에 가장 많은 우연을 만나 길들이고 싶다.
우연이냐 필연이냐? 그 자체는 인간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연은 인식하지 못한 필연이라고 말했고, 나는 필연은 인식하지 못한 우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식 아닐까요. 내 옆에 그 여자가 우연하게 앉았든, 그 여자가 필연적으로 앉았든,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인식의 힘, 시를 사랑하는 힘 아닐까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인식의 힘은 언제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시를 온전하게 독해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내 옆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앉아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 옛날 허름한 시골 버스정류장에 눈으로는 창밖을 보면서도, 마음은 옆자리를 훔쳐보았던 때가 그립네요.
인간은 경험을 바탕으로 인식하죠.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바다를 보지 못했습니다.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라도 바다를 봤을 법한데, 지금 제 기억에는 고등학교 1학년 전까지의 바다는 없습니다. 드디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서해바다를 처음 봤습니다. 잔잔한 바다였지요. 물이 들어오면 뻘흙이 잔뜩 몰려와서 ‘무슨 바다가 이렇게 지저분해?’하며, 모든 바다가 다 황토색인 줄 알았습니다. 모든 바다가 다 잔잔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동해바다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잔잔하지도 않았고, 황토색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것이 바다일까 한참 생각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서해바다를 보고 동해바다를 본 간격보다 더 많은 바다가 지나갔습니다. 어느날 문득 처음 시를 쓰게 했던 어떤 여자아이가 생각납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주 밝은 광채가 한쪽에서 빛났지요. 그 광채 한가운데 그녀가 서 있었습니다. 그녀와 그날 버스를 함께 탔는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빛 때문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서해바다에서도, 동해바다에서도 보지 못한 광채였습니다.
인간은 경험을 바탕으로 인식하죠.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바다를 보지 못했습니다.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라도 바다를 봤을 법한데, 지금 제 기억에는 고등학교 1학년 전까지의 바다는 없습니다. 드디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서해바다를 처음 봤습니다. 잔잔한 바다였지요. 물이 들어오면 뻘흙이 잔뜩 몰려와서 ‘무슨 바다가 이렇게 지저분해?’하며, 모든 바다가 다 황토색인 줄 알았습니다. 모든 바다가 다 잔잔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동해바다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잔잔하지도 않았고, 황토색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것이 바다일까 한참 생각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서해바다를 보고 동해바다를 본 간격보다 더 많은 바다가 지나갔습니다. 어느날 문득 처음 시를 쓰게 했던 어떤 여자아이가 생각납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주 밝은 광채가 한쪽에서 빛났지요. 그 광채 한가운데 그녀가 서 있었습니다. 그녀와 그날 버스를 함께 탔는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빛 때문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서해바다에서도, 동해바다에서도 보지 못한 광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