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헌책방

볕이 좋은 날
빈 가방을 들고 헌책방에 간다.*

오래된 목차 두 번째 단추까지 풀어
허름하고 가볍게
한 페이지씩 양쪽 어깨에 걸친 책방 주인은
볕을 쪼아먹은 먼지
소반에 뜨거운 양은 냄비로 헌책 표지를 찍는다.
젓가락에 끌려 나오는 면발은 언제나 단행본 순정 만화처럼 혼자 운다.

서가는 모든 책의 밑줄
다들 중요하고 잘난 날들이지만
오래된 문장까지 환한 날들이지만

허기진 가장이 눅눅한 활자를 라면에 말아 먹고 있다.
너덜너덜한 나이가 녹슬고 있다.

변색한 책의 곳간
누구는 회전무대라 하고
뺑뺑이라 하고
혹 누구는 무덤이라 하고

헌책방을 나선다,
인세와 판권은
빈 가방 먼지

안전한 속도로
데워진 중간제목만 읽지만
여름이 난감하다.

불이 났어도
물을 뿌릴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책 세일

나잇값도 모르는 지면 근처를 돌고 돌아 오르내린다.

그네,
언제부터 나를 매달고
앞뒤로 흔드는 제목을 공중에 매달아 놓았을까.

*이운진 시인의 시

보다,는 미친 짓이다

모든 창문은 편집증 환자다
항상 불신과 의심 가득한 어둠만 껴안고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인격 장애를 가졌다
꽃 진 마음 절여 낸 여울까지
자기 마음대로 자른다
다른 창문의 고통을 창문은 전혀 알지 못한다

가끔 환각의 빗물을 몇 날 며칠째 흘리기도 하지만
창문에서 벗어나라는 말을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은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병 걸린다, 제발
다른 것도 먹어보라 해도 편식한다
말 듣지 않는 아이다

욕망의 방아쇠
회수할 수 없는 충동의 실탄
햇살을 되쏘는 유리의 본성
보다,는 원리주의자다

어떤 창문은 구름만 먹고 구름만 토해놓는다
이런 창문이 가장 교리에 충실하다
어떤 창문은 그네를 옆에 끼고 있는데
거식증에라도 걸렸는지
먹고 뱉기를 반복하는 환자다

농담처럼 꽃 피어도
산 산
조각나지 않는 저 고집

창문은 늘 창문만 본다
내가 이 악물고 기웃거려도
나한테는 제가 보여줄 계절만 걸어두고
닫는다

내 눈알 파서 바닥에 내팽개쳐야
그나마
깨져 뒤틀린 창문에서도 떠나지 못하는 몸뚱어리
용서할 수 있을까

눈 한 번 깜빡

엄마는 당신이 살아온 날을 소설로 쓰면 몇십 권은 될 거라면서도 눈 한 번 깜빡하니까 머리가 하얗더라는
되도 않는 역설을 자주 말씀하셨다, 꽃이 핀다

하긴 엄마 뱃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도 황홀한 인연인데 엄마가 한평생 한 번 깜빡인 눈은 얼마나 이생이 아름다울까, 꽃이 나부낀다는 것은 꽃이 진다는 말인데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한 생이 지나고 또 다른 생을 맞는다

엄마가 쓴 이번 생 이야기 읽어보려고 엄마가 서 있던 자리에서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는데
왜 계절은 저만큼 먼저 꽃을 내던지는지 다시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이성수

  • 시집 『눈 한 번 깜빡』
    『그대에게 가는 길을 잃다, 추억처럼

시작노트

살다 보니, 필연보다는 우연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의 탯줄을 잡고 낑낑거리면서 태어난 것도 우연이다. 이 우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자의 수를 대면서 확률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 확률치고는 참 더럽고, 치사하다. 생지옥 같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현재라는 시간을 숨 막히게 살아가면서 아침에 탄 기차에서 나보다 좀 젊고, 단정한 여자가 옆자리에 앉아 먼 데로 여행하시나 봐요?” 하고 물을 줄 꿈엔들 알았을까. 살다 보니, 기차를 많이 타지도 않았는데, 내 옆자리에 여자가 앉은 적도 없고, 여자와 말을 섞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우연히 나에게 말을 걸어온 여자를 만난다. 이 여자와 연애해야 한다. 내게 시는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아서 말을 걸어온 여자다. 그녀와의 연애는 우연이고, 불온한 온기다. 세상에 가장 많은 우연을 만나 길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