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글씨
캘리그라퍼인 박지영 작가, 그녀의 글씨 안에서 우린 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글은 그녀가 내내 길 위에서 쓰여지면 만나게 되었던 인연과 경험의 글자들이 될 것이다.
1. 문방오우
내 글씨의 대부분은 길 위에서 만들어졌다. 가만히 방에서 쓰는 것도 좋지만 길 위에 서 있는 붓은 어딘가 미묘하게 더 생기가 있었기에, 틈만 나면 데리고 나섰던 것이다. 문방사우에 ‘길’이 추가되자 삶은 불편해졌고, 기쁨은 커졌다. 스무살 겨울, 스위스가 그 시작이었다.
베른에는 아케이드가 많았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칸에 자리를 잡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숫자 8을 가로로 눕힌 모양을 그리면서
손을 풀었다.
8이라는 숫자는 손목 풀기 좋았다.
나비 나는 모양 같기도
무한대 기호 같기도 했다.
이내 적당히 손에 다시 열기가 돌았고
그 리듬과 방향으로
한글을 써 보았다.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나는 이 새로운 모양이
자칫 어딘가로 도망가 버릴까 봐
내가 아는 한글 단어를
계속 적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적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내 주변으로 작은 원형의 관객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게 한글이고, 나비체라고 말했다.
장자의 나비와
무한대 기호의 움직임을 따서 만들었다고
무의식의 흐름대로 읊었다.
무의식의 흐름이지만 허튼 소리는 아니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철학자가 장자였고
내가 사랑하는 현자들은 내 안에 몰래 살다가 조건이 맞으면 이런 식으로
갑자기 툭 튀어 나올 수 있다고 믿었다.
사진: 인사동 길거리 2004
사람들은 나비체 한글로
자신들의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자녀들의 이름을 보고 싶어 했다.
나는 내 손에 나비가 도망가기 전에 얼른 그것들을 써냈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나비체 이야기를 다시 해달라고 했다.
그들의 친구와 가족들 중에는
사진 찍는 사람
갤러리스트
타투이스트 등
재밌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나와 이런저런 작업을
함께하길 희망했다.
나는 감사했고
재밌었고
그 글씨를 가지고
참 많이 돌아다녔다.
나는 사라예보에서 브뤼헤까지
홍대에서 인사동까지
길바닥에서만 얻어지는
손의 움직임을 수집했다.
사진: 나비체 예시, 만공선사의 ‘세계일화’ 중 일부, 2014 서울
사서 고생을 할수록
새로운 글씨가 나오는 바람에
멈출 수가 없었다.
잘 곳이 없었던 날은 딱 두 번이었는데,
한 번은 자그레브.
다른 한 번은 로테르담.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돈이 없으니 대신 글씨를 내밀었다.
기적처럼 방 하나를 건네 받고는
뒤로 방문을 닫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잘 곳이 없어 하루 종일 걱정했던 마음과
침대의 포근함이 부딪히면서
살아있음의 감동이 밀려왔다.
수중에 돈이 없는데도
내일이 걱정되지 않았다.
사진: 나는 글씨를 써 주고 돈도 받고 물건도 받았는데 콧수염 남성이 주었던 미니 나침반은 가장 감동적인 물물교환 중 하나였다. 2009 자그레브
박지영
- 1983 대구 출생
- 1995 김정수 선생 서예 사사
- 2002-2003 북미, 중서부유럽 서예 버스킹
- 2004 YG ENTERTAINMENT 지누션 4집 캘리그라피 작업(앨범 자켓 가사)
- 2014 논현 쿤스트할레 개인전
- 2015 인사동쌈지길 계단갤러리 개인전, 메르세데스 벤츠 협업 (2015서울 모터쇼)
- 2016 독일 증권 거래소 전시, PARKJIYOUNG CALLIGRAPHY SEOUL 스튜디오 오픈
- 2017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2017 기획전 METAGRAPHY
- 2018 폭스바겐 코리아 협업 (Project New Beginning)
- 2019-2022 재외공관, 한국 문학 사업
멋있네요!
글씨도 아름답고 글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