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 에세이

천 개의 바람이 되어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명콤비를 이뤘던 “내일을 향해 쏴라1969년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였다. 서부 개척 당시 두 무법자, 선댄스 키드(Sundance Kid)와 부치 캐씨디(Butch Cassidy)의 굵고도 극적인 일생을 그린 작품이었는데 그 무대가 와이오밍이었다.

 선댄스는 주 경계의 불과 천여명 남짓한 소읍. 용암 더미가 5천 피트나 솟은 악마의 탑(Devil’s Tower)에서 동쪽으로 15마일, 옛 인디언 성지, 블랙 힐로 가는 길목에 터잡은 선댄스 키드의 본거지였다.

 그의 단짝, 부치 캐씨디는 독실한 몰몬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일찍 떠돌이가 되어 정육점에서 일한 탓에 부치란 별명을 얻었다. 서부 개척사를 보면, 이들만큼 은행 약탈과 열차 강도에 신출귀몰한 무법자도 없었다고 한다. 타고난 용맹함과 치밀성, 그리고 위트 넘치는 명석함으로 전설적인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이들은 남미까지 내려가 광산임금차를 털다 매복한 볼리비아 군대에게 결국 사살 당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서로를 엄호하며 군대의 집중사격을 뚫고 뛰쳐나가는 잔상이 아직도 진하게 남아있다.

 에너지 붐이 휩쓸던 80년대 초, 나는 첫 직장을 와이오밍에서 잡았다. 그리고 5년을 살았었다. 엑손, 텍사코등 굴지의 회사들이 새 유전과 광산을 개발하고 우라늄 채굴을 가속화했던 그 즈음, 주 환경청도 급속도로 팽창하던 때였다.

 나는 환경 담당관으로 한반도보다 넓은 와이오밍 주를 구석구석 다녔다. 수질정화법에 의해 새로 설치된 오염 처리시설들과 지하수 관리 현황을 감리하는 일이 주된 임무였다. 나는 다니면서 산재한 파이어니어들과 인디언들의 자취를 직접 살펴볼 기회도 얻었다.

 감옥 벽에 칼로 새긴 선댄스 키드의 육필 낙서, 캐씨디 일당의 벽구멍이란 비밀 아지트, 총잡이 버팔로 빌의 윈체스터 라이플, 오레곤 트레일의 라라미 요새 등, 곳곳의 유적들이 보존돼 있었다. 대부분 백인들의 서부 개척을 미화하는 전설로 살아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름 없는 벌판에 흩어진 인디언들의 돌무덤 앞에서, 서부 개척의 명목으로 죽어간 한 많은 그들의 숨은 전설을 들었다. ‘어느 인디언의 시’로 불려온 노래가 바람에 실려왔다.    

 “내 무덤 앞에 서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답니다/ 나는 그곳에 잠들지 않았어요/ 나는 떠도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옛 와이오밍 황야는 샤이엔과 수 인디언들이 주인이었다. 이들은 말 잘 타는 용사들로 지천이던 버팔로를 사냥하며 평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1803년 미 연방정부가 프랑스와 루이지애나 구매 협약을 맺고 광대한 이 지역을 사들인 후, 백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인디언 추장들은 ‘붉은 구름(Red Cloud)’성난 야생마(Crazy Horse)’였다. 그들은 성지를 사수할 각오로 백인들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뤘다. 이 때 가장 유명한 전투가 ‘리틀 빅혼전투다. 1876년 여름, 무자비한 카스터 장군의 제 7기병대를 인디언들이 포위 몰살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승리도 잠깐, 미 정부는 이를 구실로 인디언들을 블랙 힐에서 영원히 몰아냈다. 성지를 빼앗긴 채,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선댄스 키드 일당들도 이때 블랙 힐로 금을 찾아온 백인 떠돌이의 한 떼였던 것이다.

 아픈 인디언들의 역사가 절절해도, 와이오밍 성지 끝자락 옐로스톤은 아무 일도 모르는 듯 아름다웠다. 끝없이 들어찬 침엽수림, 매시간 뜨거운 물줄기를 50m나 뿜어내는 충직한 종같은 간헐천, 그리고 3백미터 깊이로 병풍처럼 펼쳐지는 황금색 협곡…

 이 절경 중 아직도 내 뇌리에 가장 선명한 건 옐로스톤 호수 위에 뜬 달이었다. 조상 뼈를 묻은 신성한 땅을 다 빼앗기고, 한겨울 내륙 깊숙이 피신해 들어온 그 무리들이 본 달은 얼마나 차갑고 비통했을까? 싸늘한 바람이 또 지나갔다.  

 “나는 무덤을 덮는 부드러운 별빛입니다/ 내 무덤 앞에 서지 마세요/ 그리고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답니다/ 나는 죽지 않았답니다.”

 ‘붉은 구름성난 야생마의 숨결은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아직도 살아있다.

김희봉

  • 수필가, 버클리 문학협회장
  • 서울 출생, <현대 수필> 신인상 (1997)
  • 샌프란시스코 한국일보 (환경과 삶) 고정 칼럼 연재 (1995 -2022)
  • 제 1회 <시와 정신> 해외 문학상
  • 수필 산문집 <불타는 숲>(2001), <안개의 천국>(2017)
  • 미주 수필가 협회 창립 위원, 버클리 문학 협회 회장, <버클리 문학> 주간.
  • 현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