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발달심리학

아동발달심리를 배우고 있었어요 오월이었는데 늙은 교수가 제 새끼 자랑만 해댔어요 황야의 마녀처럼 빨간 입술로 아파레시움* 주문을 걸어요 찌그러진 호흡으로 교수의 구찌스카프에 매달렸던 하얀 나비는 천천히 그늘 속으로 사라져요 난 그늘을 만들면서 놀았어 푸른 나무에 둘러쳐진 하얀 운동장에서 그 나무를 믿으며 잘 못 자라났지 무럭무럭 믿음은 울창해지고 그늘은 자꾸 캄캄해지지 난 그게 행복한 유년이라고 믿어야만 했는데 엄마는 구멍을 내면서 놀았구나 구멍마다 햇빛이 들어오고 쥐새끼들도 햇빛을 받으며 놀았다고 숨소리에도 그림자가 따라다녔다고 엄마는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애벌레 소리에도 귓속뼈가 얼어붙고 작은 삼촌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데 하얀 나비는 부고처럼 칠판 위로 날아오르고 교수의 후까시를 잔뜩 넣은 머리카락 속에서는 헬기가 뜨고 사격이 시작되고 총탄이 날아오고 그 늙은 교수가 녹색 칠판을 오월처럼 자꾸 긁어대는 거예요 엄마는 서쪽 마녀의 마법처럼 발달단계도 없이 늙어버렸는데 아직도 부재중인데 그 늙은 교수의 자식새끼는 아동발달심리에 맞춰 잘 자라나고 있었나봐요 개새끼들처럼 행복하게

*아파레시움 Aparecium: 감추어진 것이나 숨겨진 것들을 나타나게 하는 주문

상황 88-1

나는 방구석에
오래 앉아 있을 거에요
겨울 이불처럼 무겁게
내려앉아서
벽에 피어나는 곰팡이처럼 푸른
꿈을 꿀 거에요

 작고 포근한 얼룩으로
이 세상에 오래오래 남을 거에요

가정상비약과 말린 과일 냄새들

눈빛으로
오래된 천장 모서리로
어젯밤의 그 거미줄은 어긋난 미래처럼
더 완벽해지고 방대해진다

포도주처럼 붉은 포비돈요오드액을
핀셋으로 쓱쓱 문질러 바르면 노을이 지고
찢어진 상처에서는 말린
열대과일 냄새가 났다
아직도 길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오월처럼 푸르게 자라나고
밤마다 이력서를 고쳐 써도 흩어지는 기억들
면접관의 예의 없는 질문들
깨진 유리 조각처럼 쓰라린 눈빛들



들개처럼 덤비는 황갈색의 호흡들

오늘도 포비돈요오드액에서는 말린 과일 냄새가 나고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찢어진 상처를 받치고 있는
척추뼈처럼 낮게 구부린 자세들

김소영

  • 디지북스 작은시집 [그린란드]
  • 달아실 시집 [엔돌의 마녀]

시작노트

이상한 일입니다. 다시 봄이 오고,
작은 가지에서도 꽃이 피어나고,
나는 밥을 먹습니다.
눈부신 풍경은 무심하게 내 어깻죽지를 툭 치며 지나갑니다.
창밖이 화창해질수록 움츠러드는 마음들이 상처를 더듬는 봄.

 1980년의 518일 광주의 봄과 2014년의 4 16일 안산의 봄은  아직도 아픈 상처로 내 주위에 머물러있습니다.
나는 그 상처들을 아는 체하기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기도 무섭습니다.
작은 손짓 하나로도 툭 터져 나올 것 같은 물컹하고 무거운 슬픔들이 피어나는 꽃송이에도, 아침 밥상 위에도 끈적끈적 묻어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문장들이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 주기를, 작은 입김으로 호호 불어 보지만
내 시들이 갖고 있는 부끄러운 간격들이
아픈 사람들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는 위로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