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피어나는 별
전사였던 나
무쇠솥, 프라이팬은 중요한 순간마다 나를 찾았고
굴복시킨 건 아니야
그날
내 주위에만 머물던 퐁퐁, 고무장갑, 행주들까지
햇살마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기척
죽은 바퀴벌레가 내려다보이는 싱크대 위에서
그런 내게로 익숙한 손길이 다가왔어
뼛속까지 용맹했던 나
빛을 만드는 일은 이미 알고 있고
이런 철수세미를 바라보는
끝과 시작의 곁에서
자주 보는 개였다
오래 그래왔던 것처럼 몸짓은 수행에 가까웠으나 귀를 때리는 소리
마르고 지친 또 다른 개
선득한 마음
한밤의 개
일생을 부지런히
캄캄한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생존 벙커에서의 사랑
소행성이 떨어졌다
충돌을 예고한 인공지능은 야적장으로 보내졌고
체감에 둔한 대통령은 합리성을 내세우며 웃어넘겼다
파편에 맞아 돌이변이가 된 지구의 생물들
군대가 파멸해 가는 동안 붕어빵을 먹다 애완 금붕어에게 삼켜진 아이
여름 해변을 걷던 써니와 나는 작별인사도 없이 폐허에 휩쓸렸다
어디에도 태양은 없었다
여름은 우리의 입술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포식자를 피해 지하 벙커에 숨은 생존자들
놓이지 않는 서로의 마음을 꼭 껴안았을 텐데
캄캄한 숨소리조차 입맞춤이었을 텐데
벙커에서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생존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듯 모르는 듯
한없이 줄어드는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을 보면서
어둠에 붙은 작은 거미 한 마리 놓친 것 또한 이유가 되어서
불안은 불안대로
수많은 미래가 품에 안겼고
징조는 징조대로
쉬쉬했다
식량이 바닥났다
마지막 젖소는 검은 젖을 흘리며 쓰러졌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식량 수색대
써니는 다른 벙커의 수색대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벙커의 유일한 싱글이자 셰프로 주방을 지키는 것만이 내 볼품없는 업적이었다 다들 미친듯이 미네스트로네를 사랑했다 백만 번째 잡은 변이는 써니를 위한 수프이고 싶었으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생존자들은 예민했고
그녀는 공명했다
밤을 어지럽히는 소리들 속에서
써니를 껴안을 수 있을 것인가
살아남은 자의 사랑이 이토록 우화일 수도

김인옥
- 2017년 <문학나무>로 등단.
- 2020년 재외동포문학상 수상.
- 시집 <햇간장 달이는 시간>.
- 전자시집 <언브로큰>
시작노트
하루가 끝나버린 세상처럼 느껴졌다. 좁은 골목 끝에 다다르자, 빛바랜 나비의 날개들이 흩어져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당신은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죽음은 현실을 깨닫게 하는 의식처럼 다가왔다. 하늘 한쪽에는 먹구름이 드리웠고, 달의 그림자가 지구 위로 서서히 가까워졌다. 밝아질 것 같던 길들이 결국 어둠으로 향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아직 살아있다고 믿으며 잠든 당신을 억지로 깨워 사진을 찍어야 할까? 어쩌면 다음 생은 오롯이 혼자 사진틀에 갇힐 것이다. 나비 사체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막다른 골목을 피해 열심히 살아왔다. 이런 일에 이유를 묻지 않기로 했다. 빛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돌아가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끝과 시작처럼 무거운 경험들이 감정을 짓누르며 시 속에 자리잡았다. 어쩌면 이 비현실적인 설정은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였을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대한 궁금증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그로테스크한 상황 속에서도 희미한 희망의 빛이 시를 곁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