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언어

아침이 오자 창문 너머로 ‘마미~~’를 외치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옆집은 유치원이다.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자 새로운 아이들이 눈에 띈다. 처음으로 유치원 문턱을 넘는 세 살배기의 처량한 울음과 뒤돌아 몰래 눈가를 훔치는 엄마의 숨죽인 울음이 공기를 축축하게 적시는 달. 1월이구나.

이미 겪어 본 자의 여유인 것일까? 창문 너머로 ‘엄마, 엄마~’ 애타게 울부짖는 아이들을 보면 짠하면서도 귀엽다. ‘엄마’라는 한마디에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조금의 원망이 따뜻하게 녹아있다. 듣고 있자니 살며시 미소 짓게 된다. 오래전 나에게도 있었던 특별한 울음의 순간이 떠오른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조기 진통으로 병원을 찾았다. 이미 첫째를 조산했던 경험이 있어 밀착 관찰 대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출근길 별안간 진통이 시작되었다. 빠르게 차를 돌려 입원 절차를 밟고 배에는 주렁주렁 기계를 매단 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산통을 견디며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예전부터 의사들에게 귀에 딱지 앉도록 들은 태아의 발달과정이 떠올라서였다.

태아는 보통 34주가 되어야 폐가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 성숙된다. 37주에는 흡인(빨기) 반사를 연습하게 되고 그것을 배우기 전에는 스스로 배를 채울 수 없다. 그렇기에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거치지 못한 태아는 숨 쉬고 먹는 기본 생존 기능을 터득하기도 전에 세상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아기는 이제 막 33주에 진입했지만, 의사는 폐 성숙 주사를 맞아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 효과가 있기에 지금처럼 진통이 시작되었을 땐 의미가 없다고 기다려보자고 했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본격적인 산통이 시작되고 30여 분만에 2kg의 가냘픈 아기는 엄마의 몸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으앙~”하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병실 가득 울려 퍼졌다. 모두가 숨죽여 기다리던 소리였다. 그 순간 나는 울음이 세상 최고의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운다는 것은 숨을 쉰다는 것. 그것은 곧 살아있음을, 그리고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했다.

아기는 아마 따뜻한 엄마의 자궁을 떠나 갑자기 들어온 강렬한 빛과 피부에 닿는 차가운 감촉, 그리고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터였다. 살기 위해, 살고 싶어 온 힘 다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는 위로와 안심의 소리로 다가왔다. ‘엄마, 나 숨 쉴 수 있어. 엄마, 나 혼자서 해냈어.’

여러 검사를 위해 잠시간 품에 안았던 아기를 다시 의사에게 건네주자 미안함이 몰려와 나 또한 엉엉 울었다. 이것은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의 눈물이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한동안 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아직 살이 붙지 않아 앙상한 뼈를 드러냈던 아기는 다음날 부기마저 빠지자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 해졌고, 체온을 스스로 유지할 수 없어 인큐베이터로 옮겨졌다. 인큐베이터가 아기를 위한 온실이라는 것에 안도하기는커녕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 젖을 빨 수 없어 코에는 위로 연결되는 기다란 호스가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다. 주사기를 통해 얇은 관으로 모유를 주입해야만 했다.

아기를 신생아 응급실에 남겨둔 채 혼자 산모 병동으로 올라오는 길은 너무 춥고 쓸쓸했다. 핑크빛 볼에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 쌔근쌔근 잠을 자는 건강한 옆방 아기를 보니 마음이 아파져 왔다. 힘차게 젖을 쭉쭉 빠는 아기가 부러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기는 저체중아들이 자주 앓는다는 황달과 요로감염을 동시에 얻었다. 3주 만에 겨우 집으로 돌아오고 일주일도 안 되어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 항생제를 투약해야 하는데 신생아의 혈관을 잡기가 쉽지 않던 나머지 아기는 발바닥에도, 손등에도, 이마에도 정맥이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몇 차례나 주삿바늘에 찔리고 또 찔려야 했다. 그것은 고정해 놓은 주삿바늘이 아기의 작은 움직임에 빠질 때마다 반복되었다.

여기저기 찌르다 더 이상 찌를 곳이 없어진 어느 날, 한 시간을 꼬박 씨름하던 간호사는 포기를 선언했다. 아직 투약해야 할 항생제가 하루치 더 남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가느다란 혈관은 주사가 닿을 때마다 수축하며 달아나버렸고 작고 가냘픈 몸은 더 이상의 주삿바늘을 거부했다. 아기가 태어나고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그날 눈물을 닦으며 결심했다. 이 아이를 누구보다 건강하고 씩씩하게 키워내겠다고.

이름에 ‘빛’이 들어간 아이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처음으로 유치원에 가던 날, 옆집의 여느 아이들처럼 ‘마미’를 울부짖으며 원망의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슬프지 않았다. 때론 아이의 울음이 ‘엄마, 나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요.’라는 우렁찬 외침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친구와 놀다가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찔끔 날뻔했지만 참았어’라는 아이의 고백에 되레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말이다.

오늘도 나는 옆집 아이들의 울음에 귀 기울이며 슬며시 미소 짓는다. 잠시 뒤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을 알고 있다.

반쪽이와 두쪽이

난 반쪽짜리다. 태생은 서울, 사는 곳은 시드니. 12년을 한국에서 24년을 호주에서 보냈다. 전형적인 한국 사람의 모습을 한 호주 국민이다. 집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밖에선 영어를 사용한다. 반은 한국인, 반은 호주인인 셈이다. 남편은 나보다는 늦게 왔지만 한국과 호주에서 반반의 삶을 살았으니 그 역시 반쪽짜리다. 그런데 반쪽이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자 이 아이들을 반쪽이라 해야 할지 한쪽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어 이름을 짓지 않은 탓에 이곳 사람들은 대화도 나누기 전에 나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너 영어를 썩 호주 사람처럼 한다’는 말은 칭찬으로 둔갑한 무자비한 차별이다. 의도는 그게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직접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은 바꾸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 나의 이름인 새미(Saemi)는 모두가 쉽게 발음하지만, 누구도 단번에 읽어내지 못한다. 영어는 물론, 전형적인 한국 이름 같지 않아 국적을 가늠하기 힘들다.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게 좋지 않으면서도 이름만으로는 어떠한 힌트도 주고 싶지 않다.

대학 시절 교양 과목으로 일본어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출석을 부르던 교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나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좀 전에 외치던 ‘사에미(Saemi) 이 나였다는 것을 눈치채고 ‘사에미 여기 있습니다’ 대답했다. 그날 이후 일본어 교실에서 나의 이름은 ‘사에미’였다. 나중에 일본어로 새미가 매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사에미로 남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은 방황의 시기를 거치고 휴학을 결심했을 때, 대학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Dear Saemo’로 시작하는 편지는, 웃기지 않은 내용을 뜯기도 전에 웃기게 전달해 버린, 정말이지 웃긴 편지였다. 사무실에서 낸 오타였지만, 휴학을 거치고 자퇴의 길로 들어서자 정정할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어떤 이유에선가 그 후로도 몇 통의 편지가 날아왔는데, 그때마다 Saemo로 쓰여 있던 것을 보면 그 학교에 다닌 것은 새미가 아닌 세모였다고 묻어두고 넘어가는 편이 오히려 유쾌할 듯하다.

호주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려주면 열에 여덟아홉은 Sammy로 표기하는데, 영어로 Samantha(사만사)라는 이름을 줄여서 그렇게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굳이 정정하는 수고로움은 웃으며 넘긴다. 내친김에 하루 동안 사만사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외에도 이름에 얽힌 일화는 많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순수 한글인 내 이름을 사랑한다. 샘물의 샘에서 따와 ‘샘’이 될 뻔했지만 샘이 많아질까 ‘새미’가 되었다. 되려 함부로 샘을 부려서는 안 될 것 같단 생각으로 살게 되었으니, 이름은 때론 삶의 방향성까지 정해주기도 한다.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반쪽짜리 이름을 지어 줄 것이냐 한쪽을 택할 것이냐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게다가 첫째가 5주나 일찍 태어나버리는 바람에 발등에 불 떨어진 마음으로 급히 이름을 정해야 했던 나와 남편은 결국 양쪽 모두를 선택했다. 학교에선 영어 이름으로 집에선 한국 이름으로 불리며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 두쪽이 들이 되었다. 반쪽이랑 두쪽이의 차이는 사실 크지 않다. 굳이 나누는 것 자체가 의미 없지만 이러한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바로 반쪽이의 숙명이다. 이왕이면 반쪽씩 나뉜 것보다는 양쪽에서 온전한 한쪽으로 남는 게 좋다. 이것이 상처받은 반쪽이의 치유법이다.

박새미

  • 창작산맥 2020 수필부문 신인상
  • 1회 시드니 문학상 (2023) 수필부문 당선
  • 시드니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